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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른손으로 천천히 언저리를 더듬어 봤다. 다행히 아가씨의 경혼검 칼이 손 옆에 그대로 놓여

있었다. 힘없이 가만가만히 손을 뻗쳐서 칼자루를 움켜잡았다.”으흐흐흐! 흣! 흣!”아가씨의 입

에서 형언키 어려운 처참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.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. 새파란 검광(劍

光)이 번쩍하고 뻗쳐 나는 순간 아가씨의 서슬이 시퍼런 칼날로 자기 목을 부욱 그어 버리려

고 했다.그러나 검은 옷을 입은 복면의 사나이가 그 광경을 보고 그대로 있을 리 없었다. 그는

벌써부터 이런 경우를 생각하고 방비책을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.”헤헤헤!”멸시에 가까운 웃

음소리를 터뜨리며 두 손가락을 탁 퉁겼다.본래, 매약화 아가씨의 오른손에는 아무런 힘도 없

었다. 간신히 움켜잡고 있던 칼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새파란 무지개를 뻗쳐 내며 옆으로 날

아 버렸다. 결국 경혼검은 복면을 한 사나이의 손에 퉁겨져서 너댓 장 거리나 날아 시냇가

바윗돌 위에 나뒹굴고 말았다.매약화 아가씨는 진기를 모아 몸을 일으켜 보려고 무진 애를

썼다. 그러나 도저히 몸을 일으켜 앉을 수가 없었다. 손과 발을 간신히 꼼지락 꼼지락할 수

있을 뿐, 전신의 기운이란 기운은 모조리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.43. 억제할 수 없는 육

정의 소용돌이매약화 아가씨는 죽는 한이 있어도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 생각하고 기진 맥진

한 몸으로 또 한 번 이를 악물었다. 그러나 아가씨가 아무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앙칼진 성

격의 소유자라 해도, 죽음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생각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두 줄기

뜨거운 눈물이 볼을 적시었다.물론, 아가씨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. 그것이 단지

죽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면 매약화 아가씨는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.장차 당

해야 할 모욕이 너무나 두려웠다. 일개 여자의 몸으로, 더군다나 평생을 티끌 한 점 없이 곱

게 지켜온 처녀의 몸을 그대로 간직한 채 깨끗이 죽어 간다면 아무런 유한이 없이 눈을 감을

수 있을 것 같았다.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닥쳐드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일종의 잔인하고

혹독한 모욕임을 알게 되었을 때, 아가씨의 놀라움은 형언키도 어려웠다.매약화 아가씨는

비록 미혼의 처녀라고는 하지만, 거친 세상과 무예계를 활보하고 돌아다닌 지 이미 팔, 구

년, 남녀간의 일을 샅샅이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. 검정 옷을 입은 복면의 사나이가, 아가씨에

게 장차 닥쳐올 일이 뭣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뭣인지 명백히 추측할

수 있었다.상대방이 이렇게까지 음탕한 독약으로 자기를 굴복시키려고 한다는 한 가지 사실

만으로도 아가씨는 자기 눈앞에 전개될 사실이 뭣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차렸다.